‘허머가 좋아? 그럼 향수를 뿌려봐’.
최근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기사제목이다. 허머는 미국 자동차 회사 지엠(GM)의 대형 오프로드 자동차 브랜드다. 기사에선 이 터프한 자동차 브랜드를 딴 향수가 잘 팔리는 현상을 ‘소비자들이 악천후와 험악한 지형을 달리는 강인하고 남성적인 허머 자동차의 이미지를 입고 있다는 심리적 보상을 얻고 싶어서’라고 분석했다. 또 기사는 자신이 감각적인 소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품목은 ‘캐딜락 냉장고’ ‘포르셰 커피메이커’라고 전했다. 경제위기로 자동차 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와중에 자동차 브랜드 파워를 이용한 이른바 ‘라이프 스타일’ 상품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는 것. 불황 때문에 값비싼 자동차를 사기보다 브랜드를 차용한 몇 만원짜리 소품으로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이런 소비 형태는 미국뿐 아니라 국내에도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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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가 차량의 이미지를 닮은 패션·잡화는 ‘적은 돈으로 큰 만족을 주는’ 불황기 트렌드의 대표 사례다. 가격은 기존 캐주얼 브랜드보다 싸고 브랜드 이미지는 훨씬 ‘고급’이어서다. [박종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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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 키홀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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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명차를 주머니 안에=회사원 김상일(34)씨는 얼마 전 BMW 열쇠고리를 선물받았다. 김씨는 “좋아하는 차 브랜드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정수원(26)씨는 수퍼카 람보르기니 로고가 박힌 모자를 쓰고 다닌다. “다른 스포츠 브랜드의 평범한 모자와 다른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각이 잡혀 있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날렵한 경주용 차를 모는 레이서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어서 좋다”는 게 그의 변이다.
회사원 이선호(31)씨는 메르세데스 벤츠 브랜드의 시계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는 “친구들은 벤츠 로고만 보고도 시계 칭찬을 한다”며 웃었다. 그는 “고가 시계를 살 형편은 안 되고, 중저가 브랜드 시계도 싫다. 하지만 벤츠 로고가 있는 시계는 뭔가 기술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데다 디자인에서도 벤츠 자동차의 품위가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벤츠 시계는 주로 10만~20만원대. ‘벤츠=럭셔리 카’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 이 정도의 시계 가격은 오히려 ‘굉장히 싸다’는 인상을 준다고 이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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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카 생산업체인 포르셰의 손목시계(上)는 대표 모델인 ‘911 GT2’의 이미지를 닮아 날렵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스포츠 브랜드 푸마에서 나오는 페라리 운동화는 페라리 레이싱팀이 ‘2008 F1 차량제작자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제작한 한정판 상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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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패션·잡화·화장품 업계의 화두는 ‘밸류 포 머니(value for money)’다. 돈은 적게 들이면서 심리적 만족을 크게 얻을 수 있는 소비를 지향한다는 것. 지난해 11월 KOTRA가 펴낸 ‘미국 금융위기 보고서’에서도 금융 위기를 겪은 미국 소비자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전했다. 자동차 업체의 브랜드 로고를 활용한 ‘라이프 스타일 상품’의 인기는 이런 소비행태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퍼카 패션의 경제학=트렌드연구소 인터패션플래닝의 김혜련 실장은 “수퍼카 업체의 각종 생활용품은 이를 테면 틈새 시장”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시장 규모가 아직까진 크지 않지만 디자인을 중시하면서 합리적인 가격대를 원하는 소비자가 많아질수록 더욱 인기를 끌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동차 업체의 생활용품은 싼 가격을 무기로 영역을 확장 중이다. 품목도 의류는 기본이고, 아기용 인형과 아기옷부터 가방·허리띠 등 잡화류에다 브랜드 로고를 단 골프 카트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다.
수퍼카라는 브랜드 이미지보다 상대적으로 싸게 상품을 파는 이들의 전략은 뭘까. 홀하우스 지프의 김성민 사장은 “본래 자동차 브랜드의 생활용품은 자동차와 같은 컨셉트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올 2월부터 미국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의 ‘지프(JEEP)’ 브랜드를 단 의류와 잡화를 정식으로 수입하고 라이선스 의류도 팔 계획이다. 김 사장은 “오프로드를 달리는 역동적인 차량인 지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옷은 디자인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상표권자인 미국 크라이슬러와의 계약 사항”이라고 밝혔다. 이런 조건에 따라 전 세계에서 정식 상표권을 취득해 의류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모두 클래식 수트나 넥타이·드레스셔츠· 커프스 등 아이템은 만들지 못하도록 돼 있다. 게다가 이 브랜드의 주력 상품은 오프로드에 걸맞게 계절에 상관없이 티셔츠나 모자 종류 등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도 브랜드의 정체성 유지가 우선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를 통해 직접 유통되는 벤츠 상표의 의류는 언론에 소개될 때 다른 차량을 배경으로 삼지 못하게 돼 있다. 벤츠 코리아 최윤선 대리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두카티 등 다른 업체도 마찬가지”라며 “벤츠라는 차의 고급 이미지 때문에 의류 등 제품을 사는 소비자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차보다 가격이 싸다고 해서 이미지까지 저렴해지면 안 된다”며 “골프 의류나 용품은 벤츠의 고가 차량 소유자들도 선호하는 편이어서 브랜드 관리를 더욱 까다롭게 한다”고 밝혔다.
강승민·한은화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홍성현(세종대 역사학과 3) 인턴기자가 기사 작성을 도왔습니다.
◆촬영 협조=정재익(모델),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차량·의상)
포르셰, 람보르기니 점퍼 내놓고 커피 메이커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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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용 차량 이미지의 지프 의상과 액세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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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이탈리아의 수퍼카 생산 업체 람보르기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첫 ‘패션 부티크’를 열었다. 람보르기니 상표를 단 각종 패션·잡화 상품을 파는 단독 매장이다. 개장 행사에서 자동차 전문잡지 ‘카매거진’과 인터뷰한 람보르기니의 최고경영자(CEO) 스테판 윙클만은 “처음으로 문을 여는 패션 부티크는 람보르기니 라이프 스타일의 전형이 될 것”이라며 “수퍼 스포츠카와 정상의 이탈리아 패션이 만난 것”이라고 소개했다.
람보르기니의 의류는 이탈리아의 유명 의류회사인 하이드로젠이 만든다. 수퍼카 회사인 람보르기니가 내놓는 패션·잡화류가 소비자들에게 생소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람보르기니는 일단 하이드로젠을 앞세워 람보르기니 표 패션·잡화에 대한 친숙함을 대중에게 안겨줬다. 그러나 옷마다 자사의 투우 문양 로고를 찍어 람보르기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날렵하고 속도감 있는 람보르기니의 컨셉트를 옷 디자인에 반영한 것은 물론이다.
람보르기니는 매장을 디자인할 때도 수퍼카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했다. 지난해 람보르기니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올미그룹 경영지원팀의 백남준 부장은 “매장 구석구석 람보르기니의 컨셉트에 따라 디자인하도록 본사로부터 지적이 꼼꼼히 들어 왔다”고 설명했다.
수퍼카의 고급 이미지를 등에 업고 패션에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포르셰다. 포르셰는 1972년 디자인 회사를 따로 세워 각종 생활용품 디자인을 직접 했다. 삼성의 카메라나 보슈의 커피메이커도 이 회사에서 디자인을 맡았다. 포르셰의 패션·잡화류 라인인 PDDS(Porsche Design Driver’s Selection)에는 최고의 품질, 기능성, 클래식 디자인이라는 포르셰 수퍼카의 컨셉트를 느낄 수 있도록 제작되고 있다. 액세서리·의류· 유아용품 등 다양한 제품 중에 포르셰 차량 화물칸에 딱 맞게 디자인된 여행용 가방이나 포르셰 모델을 그대로 재현한 모델카가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오랜 기간 저변을 넓혀 온 포르셰는 최근 또 다른 도약을 준비 중이다. 포르셰 디자인 그룹의 CEO 지그문트 루디지어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남성용 명품 액세서리 시장에서 선두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루디지어의 다음 전략은 몽블랑이나 던힐처럼 고급 필기구를 비롯한 문구류, 라이터나 커프스 등 남성용 액세서리 시장에서 명품 대접을 받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수퍼카 업체인 페라리는 스포츠용품 회사 푸마와 함께 ‘푸마-페라리 라이프 스타일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경주대회인 F1에 출전하는 페라리팀의 스폰서로 선수들에게 의상 및 신발 용품을 공급해 오던 푸마가 아예 페라리의 패션·잡화류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라인은 푸마의 날렵한 표범 이미지와 페라리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